철강 유통 현장에서 ‘좋은 매입’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낮은 가격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창고를 오래 지켜본 사람은 안다. 싸게 들어온 물건이 반드시 돈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월말에 평소보다 낮은 열연 오퍼가 들어왔다고 해보자. 시중 거래가격이 톤당 100만원인데 95만원에 500톤을 살 수 있다. 계산상으로는 톤당 5만원, 총 2,500만원의 여유가 생긴다. 영업팀 입장에서는 놓치기 아까운 조건이다.
그런데 매입 전에 한 가지 질문이 먼저 나와야 한다.
그래서 이 물량은 언제, 누구에게 팔 것인가?
철강에서 매입은 가격으로 시작하지만 이익은 재고가 창고를 떠나고 대금까지 회수돼야 확정된다. 그래서 싸게 산 것과 잘 산 것은 다르다.
가격표만 보면 거의 모든 재고가 좋아 보인다
| 항목 | 가상 거래 조건 |
|---|---|
| 시중 판매가격 | 100만원/톤 |
| 매입가격 | 95만원/톤 |
| 매입물량 | 500톤 |
| 명목 스프레드 | 5만원/톤 |
| 명목 마진 | 2,500만원 |
이 표만 보면 매입은 성공처럼 보인다. 하지만 철강재는 창고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시간이 비용으로 바뀐다. 금융비용이 붙고, 보관비가 생기며, 시장가격이 움직인다.
싸게 산 재고가 세 달 뒤 비싼 재고가 되는 이유
500톤 중 200톤만 팔리고 3개월 뒤에도 300톤이 남았다고 하자. 그 사이 시장가격이 96만원으로 내려가면 처음 5만원이던 가격 여유는 1만원으로 줄어든다. 여기에 금융비용과 보관비를 더하면 실질 마진은 거의 사라질 수 있다.
| 항목 | 매입 당시 | 3개월 후 |
|---|---|---|
| 매입가격 | 95만원/톤 | 95만원/톤 |
| 시장 판매가격 | 100만원/톤 | 96만원/톤 |
| 가격차 | 5만원/톤 | 1만원/톤 |
| 재고 | 500톤 | 300톤 잔존 |
| 위험 | 낮음 | 금융·보관·추가 가격하락 위험 |
철강 유통에서 가장 비싼 물건은 비싸게 산 물건이 아니라 싸게 샀는데 팔리지 않는 물건일 때가 많다.
좋은 매입에는 ‘출구’가 있다
매입 전에 봐야 할 것은 할인폭보다 판매 경로다. 정기적으로 소비하는 고객이 있는가, 해당 규격이 월 몇 톤씩 빠지는가, 정상적인 판매속도라면 언제 소진되는가를 먼저 계산해야 한다.
열연 500톤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재고도 아니다. 두께·폭·강종·제조사·표면상태에 따라 판매 가능성은 크게 달라진다. 잘 팔리는 규격 500톤과 팔 곳이 정해지지 않은 규격 500톤은 회계상 같은 재고일 수 있어도 영업적으로는 전혀 다른 자산이다.
너무 싼 오퍼에는 이유가 있다
평소보다 큰 폭으로 낮은 가격이 제시되면 ‘기회’라고 보기 전에 판매자가 왜 급한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월말 판매목표일 수도 있고, 특정 규격 재고가 누적됐을 수도 있다. 시장가격 하락을 먼저 예상해 재고를 줄이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수요가 약한데 공급자가 적극적으로 물량을 밀어내고 있다면 낮은 가격 자체가 하락 신호일 수 있다. 할인폭이 클수록 이유를 먼저 묻는 습관이 필요하다.
매입 판단에는 세 개의 가격이 필요하다
철강을 살 때는 최소한 세 가격을 따로 본다. 오늘의 매입가격, 현재 실제 판매 가능한 가격, 그리고 재고가 소진될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의 판매가격이다.
세 번째 가격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래서 더 중요하다. 월평균 100톤이 팔리는 규격을 500톤 사면 마지막 물량은 수개월 뒤까지 남을 수 있다. 하락장이라면 오늘의 가격차보다 그때의 시장을 상상해야 한다.
마진율과 재고회전은 함께 봐야 한다
A사는 95만원에 사서 100만원에 팔고 평균 재고기간은 90일이다. B사는 97만원에 사서 100만원에 팔지만 20일 안에 판매한다.
| 구분 | A사 | B사 |
|---|---|---|
| 매입가격 | 95만원 | 97만원 |
| 판매가격 | 100만원 | 100만원 |
| 명목 마진 | 5만원 | 3만원 |
| 평균 재고기간 | 90일 | 20일 |
| 주요 위험 | 가격하락·금융비용 | 상대적으로 낮음 |
단순히 톤당 마진만 보면 A사가 더 좋아 보인다. 그러나 자금이 몇 번 회전할 수 있는지, 가격위험에 얼마나 오래 노출되는지를 포함하면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철강 유통에서는 마진율과 회전율이 한 세트다.
매입은 영업팀만의 일이 아니다
영업팀은 좋은 가격을 보면 물량을 확보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회사 전체에서는 현재 재고, 매출채권, 창고 여유, 다음 달 결제자금까지 함께 봐야 한다.
특히 외상판매 비중이 높은 업체는 재고와 매출채권이 동시에 현금을 묶는다. 매입가격이 아무리 낮아도 현금흐름을 압박한다면 좋은 매입으로 보기 어렵다.
상승장과 하락장에서 매입 기준은 달라져야 한다
상승장에서는 재고가 많을수록 평가이익이 커져 모든 매입이 성공처럼 보이기 쉽다. 이 경험이 과잉 확신으로 바뀌면 시장이 반전할 때 큰 부담이 된다.
하락장에서는 더 위험하다. 지난달 100만원이던 제품이 95만원이면 싸 보이고, 며칠 뒤 92만원이면 더 싸 보여 다시 사게 된다. 과거 가격보다 싸다는 이유만으로 매입하면 평균단가를 낮추는 동안 재고만 늘어날 수 있다.
하락장에서는 싸게 사는 기술보다 사야 할 이유가 있는 물량만 사는 절제가 더 중요하다.
매입 전에 다섯 가지를 묻는다
- 이 물량을 살 고객이 실제로 있는가.
- 정상적인 판매속도로 몇 개월 안에 소진할 수 있는가.
- 시장가격이 예상보다 톤당 3만~5만원 떨어져도 감당할 수 있는가.
- 결제조건과 금융비용을 포함해도 실질 마진이 남는가.
- 이 물량을 사지 않았을 때 잃는 기회가 정말 큰가.
마지막 질문은 특히 중요하다. 좋은 오퍼를 놓치는 것이 손실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사지 않은 재고에서는 재고손실도 발생하지 않는다.
매입의 성적표는 창고 밖에서 나온다
좋은 매입은 가장 낮은 가격에 산 물건이 아니다. 고객이 있고, 회전할 수 있고, 회사의 자금을 과도하게 묶지 않으며, 시장이 예상과 다르게 움직여도 손실을 통제할 수 있는 물량이다.
싸게 사는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팔 수 있는 만큼 사는 능력이다.
철강 영업에서 매입의 성적표는 구매계약서에 찍힌 숫자가 아니라 재고가 창고를 떠나고 대금이 회수됐을 때 비로소 나온다.
Steel Fieldbook · 영업의 비밀 02
철강 현장에서 가격·재고·마진·고객을 어떻게 읽고 판단할 것인지 실제 거래의 언어로 풀어가는 연재다.
철강 시황과 산업 뉴스는 철강정보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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